『문제는 육체야. 우리 몸은 살로 둘러싸여 있고 피와 뼈로 가득차있어. 이 살과 피와 뼈는 유지와 부양을 요구하고, 세월이 흐르면 쇠약해져. 우리는 육신을 지켜주고 먹여 주어야 하며 병이나면 치료를 해줘야 해. 육신은 수면과 음식을 필요로 하지. 우리 뇌가 하는 활동의 대부분은 다른 기관들을 관리하는 거야. 우리 몸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일에 우리 에너지의 대부분이 허비되고 있는 셈이지. 우리의 감각은 우리를 속여. 감각 기관들이 보내는 신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되. 그 정보들을 바탕으로 세계를 해석하다 보면 미망에 빠지기 십상이지. 몸은 우리 생각이 자유롭게 펼쳐지는 것을 가로막아. 여기 컵과 물이 있어. 육체가 컵이라면 정신을 물이야. 컵이 없으면 물이 계속 흐르듯이. 육체가 없으면 정신을 자유로워져.』 [1]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나무’의 ‘완전한 은둔자’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한 구절이다. 소설 속에 그려지는 그는 자신의 주체적 정신과 사유를 그대로 유지한체 단지 명상에 불필요할 뿐인 살과 피, 뼈를 제거한체 영양액 속으로 자신의 뇌를 스스로 가둔다.
우리는 선험적으로 경험이 아닌 직관에 의해 객체를 추상화하여 인지한다. 때문에 인간은 그의 말처럼 ‘모든것은 내 안에 다 들어 있고, 태어날 때부터 이미 그러했으며, 삶이라는 것은 알고있는 것을 다시 배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가 스스로의 뇌를 육체에서 분리해, 영양액 속에서 무한의 사유를 펼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은 바로 이처럼, 지식이 선험적일 것이라는 믿음과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사유의 폭과 상상력은 모든 지식의 선험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사유와 의식은 선험적인 것이 아닌 경험적 사실에 의존한다.
천사에 대해 가지는 보편적인 인상은 백의에 날개를 가진 남자 혹은 여자의 상이다. 마찬가지로 페가수스에 대해 가지는 보편적 인상 역시 흰말과 뿔, 그리고 날개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천사의 형상과 페가수스의 상을 본적이 없으나, 이것을 표상할 수 있는 것은 각각의 표상이 개별적인 경험적 표상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인간의 표상과 말의 표상, 날개 그리고 뿔의 각각 개별된 경험적 표상의 복합으로부터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천사와 페가수스에 대한 인상이 발현된다.
때문에 인간의 사유과정은 뇌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흔히 사유과 정신, 마음의 근원은 뇌에 있기 때문에 뇌수만을 살려 충분한 영양분과 전기자극만 주어진다면 영원히 꿈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의 주체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육체로부터 인지되는 자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간과한다. 육체가 있고 뇌가 있으며, 육체가 있음으로써 대상을 인식하고 자아를 형성할 수 있으며, 동시에 지성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지식의 축적과 지성의 형성은 주체의 객체에의 개입과 분리로부터 나타난다.
인간의 역사적 발전 과정은 객체로부터 주체를 분리하는 과정으로부터 나타났다. 인간과 자연을 동일 한 것으로 인지하며, 자연 속의 인간의 모습이 아닌 적극적인 자연에의 개입가능한 주체자로써의 형상은, 객체와 주체의 분리로부터 개념을 사유 수단으로 사용하는 주체의 보편적 규정으로 객체를 완전히 환원할 수 있게 만든다.
이것은 객체를 규정하는 주체자로써의 우월성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연에 개입할 수 있는것은 인간이 자연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 기초한 것이며, 식민지의 확장과 약탈이 가능했던 것 역시 인종의 상대적 우월감에 기반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흔히 나타나는, 경제적 계급의 과시는 사유 수단으로써의 객체를 규정하는 주체자로써의 우월성을 대변한다. 지배자는 항상 도덕적으로 우월하거나, 예절, 인격 등의 형태로 언제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피지배자와 유사한 것이어서는 안된다.
여기서 중여한 것은, 인간이 주체로써 외적 객체를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서는 내적 주체 역시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유와 지성의 습득은 천사와 페가수스가 가지는 표상의 예에서처럼 객체의존적이기 때문이다. 사유와 지식 습득의 객체의존성은 주체적 자아가 객체의 욕망이나 충동에 의해 타율적으로 이끌리게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때문에 주체적 자아는 객체를 지배하기위한 내적 주체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어야한다.
인간의 존재는 무엇으로 대변 될 수 있는가? 인간이라는 형상을 지닌 하나의 육체가 인간임을 주체적으로 대변해 줄 수 있는가? 사유와 지식, 자아의 근원이 인간의 뇌를 가짐이 곧 인간의 주체성을 대변해 줄 수 있는가?
데카르트는 어느날 낮잠에서 악몽을 꾸었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자신이 절대적 진리의 표상이라 여겨졌던 하나의 사실 가령, 1+3은 4라는 진리가 그것이 실제 진리가 아님에도 악마에 의해 그것이 진리라고 세뇌되지 않았는가란 의심을 하게되었다. 그의 철학의 출발점은 모든것을 의심해야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고, 또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원칙적으로 모든 것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방법적 회의는 자신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으며 또한 이것이 자기가 확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인식에 도달하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로 대표되는 방법적 회의는 사유의 주체로써 인간의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사유는 객체의존적이며 동시에 외적 객체를 규정할 수 있는 내적 주체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어야 한다. 문제는 객체의존적인 지식의 습득과 사유 과정에서 객체간의 경험적 차이를 경험한다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 과정이 사유를 변증법적으로 몰고간다. [2]
사유의 능동성, 다시말해 방법적회의는 경험한 객체들로부터 정립과 반정립 그리고 종합을 만들어 낸다. 주체적 사유가 객체의존적으로 이루어지며, 객체의존적으로 인해 변증법적 사유가 가능해지며, 인간은 주체적 사유 속에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창조하며, 고찰한다.
인간의 존재의 대변은 바로 이러한 능동적 사유가 가능한지에 대한 핵심적 질문이 될 수 있다.
주체적 사유과 판단이 아닌 타자로의 사고 이행은, 좀 더 다양한 정보의 습득과 폭넓은 사유의 계기가 아닌 앵무새만을 양산하게된다. 변증법적인 사고와 방법적 회의로 대표되는 비판적 사고를 스스로 거세한체 단지 외형적 형상만을 뛰쫒으며,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 배제한체 사유의 틀을 닫은 인간의 행동은 본질적으로 인간으로, 따라서 볼 수 없다.
객체를 지배하기 위한 내적 주체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한체, 객체의 욕망과 충동에 이끌려 가는 행태, 그리고 반정립 혹은 정립 어쩌면 종합적 사유의 태도에 대한 비이성적 반동은 인간의 존재라는 개념에서 생각할 때 오히려 동물에 가까운 개념을 지닌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써.
[1] 베르나르 베르베르, 나무, 열린책들, 2003, 166-168
[2] 이병탁, 아도르노의 상없는 유물론, 6
러셀, 서양철학사, 을유문화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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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사자는 인간이 아니었군요.
조금 다른 의미의 인간을 지칭했는데 여기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겠네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지 안하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는데, 그렇다면 생각하는 나를 제외한 다른 인간이 존재함은 부정할 수 있는걸까요?
제가 지적하고 있는 부분과 관점과는 다른 시각에서 말씀하고 계셔서 지적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인지과학이나 심리학 쪽으로 다른 고민을 해 봐야할것 같네요.
굳이 이 글의 목적을 말하자면 특정인들을 위한 이야기들이라, 보편적 인간 존재에 대한 반론에 대해서 어떠한 반박을 하지 못하겠군요. 가령, 자본주의속의 하나의 부품으로만 작용하는 한 개인은 인간으로써의 삶을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같은 편협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으니깐요..
자본주의속의 하나의 부품으로만 작용하는 그 개인이 자신의 자유 의지로 그렇게 살고 있다면 인간적인걸까요 아닌걸까요.
물론 어릴때 교육을 그렇게 받아서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그렇지 않고 모든 관점을 비교 검토한 후 자기가 보기에는 자본주의 속의 하나의 부품으로 사는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고 하는 경우죠. 이 개인은 인간으로써의 삶을 사는걸까요 아닌걸까요.
일단 위 글은 타자가 생각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하거나 다른 대상을 바라보고 규정할 경우 몇 가지 오류가 생깁니다. 말씀하신것처럼 타자가 생각하는지 않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자유의지인지 아닌지는 판단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변증법적 사유를 언급한점에 있어서, 연령이 높아질수록 보수화되는 보편적 성향에따라 연령이 높아지면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짓게 되는 오류. 그리고 도발적 결론 자체의 모순성.
그래서 인간보편적 대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성찰을 특정 인과 특정 집단에게 요구하고있습니다. 물론 이 역시 마지막에 물음과 같은 개방적 결론이 아닌, 도발적 결론 때문에 자체적인 논리적 모순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모순을 일으키면서까지 얘기하는 것은 그 주장을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써 사용되었습니다만, 오히려 그 특정 인과 집단을 지칭하거나 사례들을 본문에 덧붙이는 것이 논리를 더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란 생각을 이제서야 해 보는군요.
말씀하신 자본주의 속의 인간의 삶에 대한 부분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와 엮어서 쓰고있습니다. 거기엔 이런 도발적 결론과 같은 문제와 오류, 그리고 말씀하신 오류들을 일으키지 않는, 물음이나 고찰 수준에서 쓰고있습니다. 당연하지만 일반적으로 어떤 사안이나 현상을 하나로 규정할 수는 없으니깐요.
말씀고맙습니다.
생각하지 않는것은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 약간 반론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이라는것에 대해서 상당한 무게를 줘버리면 육체적인 사람을 경시할 수 있는 뭔가가 발생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우려는 이미 과거 수백년간 철학계를 지배하던 '정신>육체'론의 근거가 되어 이미 니체가 그것에 대해서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생각이라는것으로만 인간을 정의짓는다는것은 상당히 위험한 결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은 보편적 인간상에 대한 사변적인 글이나 논문이 아닙니다. 이 대목은 마지막 세 단락에서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만, 굳이 밝히자면 특정인 혹은 세력에 대한 비아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