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 사유의 거세, 언제까지 돼지로 살 것인가주체적 사유의 거세, 언제까지 돼지로 살 것인가
Posted at 2011/09/22 02:52 | Posted in <에세이>/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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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그늘
한국사회는 전통적으로 이기심의 절제를 권장하는 사회체제를 유지해 왔다. 6~14세기 불교시대, 14~16세기 유교 시대가 모두 어떤 형태로든 원시대의 이해와 공동체의 의식을 옹호하는 체제였다. 이러한 사회 기조와 체제는 개인의 발전을 억압하는 체제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덕분에 민족 공동체가 살아남고, 문화유산이 현재까지 전해지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여한 것 만큼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를 살고 있는 지금의 한국사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원시대의 이해와 공동체 의식을 지키는, 이른바 전통적 의미에서의 보수는 일제 통치를 거치며 완전히 박살났다. 많은 수의 사회 구성권은 개인의 이익을 위한 이기심에 몰려 친일 행위를 선택하기 시작했으며, 자본주의의 보급으로 전통적으로 권장되어 오던 이기심의 절제는 거세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는 신 자유주의로 꽃을 피웠다.
자본주의의 보급으로 세계 경제는 발전했고, 이를 토대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라는 근대사회제도와 학문, 문화가 놀랍도록 발전했다. 무엇보다 수 천년간 민중들을 억합아던 각종 사회적 차별이 점차 철폐되고 자유와 평등이 확대되어 기본적인 인권이 보장되는 근대 문명사회가 건설되었다. 이런 놀라운 발전을 이끌어 온 곳이 바로 근대 서양의 자유주의이다.
19세기 유럽에서 자유주의가 정치적으로 강세를 띤데는 이러한 경제 자유주의의 공로가 컸다. 자유주의는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보고, 국가는 이에 대한 국가권력으로 애덤스미스의 국부론을 주요 경제 정책으로 적용했다. 이렇게 19세기 말까지 자유주의는 모든 선진국의 지배 담론이 되어 중요한 정책 논의는 모두 자유주의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유주의의 내제적 모순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러한 모순의 근본적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20세기 들어서면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소련 공산 혁명의 파국으로 모순에 대한 대안 논의는 이루어지지도 않은체, 1970년대 맞은 석유파동은 스테그플레이션을 불러왔으며 결국 내제되어 왔던 자유주의의 모순으로 경제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1970년대 경제 위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나타난 것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였다. 신자유주의 경제체계의 이념은 노동의 가치보다 자본의 지배력을 강화하겠다는 것으로, 정부가 주장하는 작은 정부와 국제 무역의 확대, 관세장벽제거와 공공부문고용의 축소, 공기업의 민영화, 부의 집중 증 자본계급에 대한 감세와 함께 국가의 복지 지출을 줄이는 것이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이다.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득세하기 시작한 이루, 점차 대중은 윤리적 의식 없이 돈만을 추구하는 천민자본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른바 돈만 밝히는 배금주의의 시작이자, 돈지랄의 시작인 것이다.
자본주의 윤리의식 속에서 함께 자라난 개인주의는 오히려 부정적인 방향을 키워나갔다. 자신이 갖고있는 것은 중요하고,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것은 빼앗으려하거나 우습게 보기 시작한다. 여기에 자본주의의 주도층인 부르주아 계층은 가진자들의 낙원을 만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안을 내 놓는다.
인구의 대다수를 만족시킬 수 없는 상황이라면, 힘있는 자들을 최대한 만족시키고 나머지는 힘으로 누르면 된다는 논리의 시작이다. 재미난 현상은 이러한 논리가 소위 가진자들의 논리가 아닌 전 인민에게 통용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가장 간단한 예가 횡단보도 위에서의 보행자와 자동차 운전자의 예이다. 보행자는 도로위에서 자동차에 대한 약자이다. 따라서 보행자는 교통신호를 철저하게 지키지만, 자동차는 보행신호를 무시한체 횡단보도 위에 끼어들거나 빨리 지나가라며 경적을 울린다. 보행자는 이 자동차에 대해 눈쌀을 찌푸리지만 누구도 불만을 표출하지 않는체 조용히 보행을 서두른다. 문제는 이 보행자가 자동차 운전자가 되었을 때이다. 운전자가 된 보행자의 행동은 위의 자동차들과 동일하게 변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약자의 위치에 있을 때와 강자의 위치에 있을 때를 철저하게 구분하며, 털끝만큼의 계급적 우위 혹은 힘의 우위가 있을 땐 상대적으로 낮은 계급 혹은 약자를 철저하게 무시하고힘으로 누르기 시작한다.
‘한 명의 천제가 천만명을 먹여살린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라는 말은 이미 속담이 되었다. 계급사회로의 편성이 진행되고 있는, 어쩌면 이미 자본에 따른 계급사회로의 편성이 구축된, 지금 계측간의 구분은 자본 그 자체가 되었다.
자본의 해바라기들
우리는 대형 할인마트에서 깔끔하게 진열된 음식들과 제품들, 그리고 착한가격을 이유로 대형 할인마트로 향한다. 대형할인마트의 폐해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일부러 비싼가격에 재래시장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비슷한 품질의 좀 더 싼 제품을 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소득이 늘어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대형할인마트가 만드는 이 착한가격의 진실은 노동자와 생산자의 가치에 대한 비용을 정상적으로 지급하지 않는데서 나오는 결과이다. 생산자의 입장에서 볼 때 대형 할인마트들은 유통권력의 막강한 힘에 기대 상품을 납품하는 제조업체로부터 물건 값을 마트간 가격 경쟁이 유리하게 무리하게 단가를 낮출것을 요구한다. 상품을 납품하는 생산업체의 입장에선 이들 대형마트들이 차지하는 매출 비중이 매우 크기 때문에 그들의 납품가를 맞출 수 밖에 없다. 이를 거부하면 진열대에서 해당 상품의 자취는 사라진다.
문제는 착한가격이 소비자의 입장에 있어 신자유주의 체제에 얼마 남지 않은 미덕이라고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은 미덕이 아니라 제품의 가격에 포함되어야 할 노동자들의 비용을 그리고 개발도상국들의 비용을 포함하지 않은체 이를 다음 세대로 전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생산과 사적 소유사이의 모순은 이렇게 생산수단이 소수의 자본가에 집중되면서 경제적 모순 그리고 사회적 대립이 발생한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노동자를 억압하고 자본가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조직과 법, 제도 등이 만들어 지며, 신자유주의 체재를 바탕으로 사회적 모순과 빈부격차는 심화되어 나간다.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경제적 모순의 심화가 더해지고, 노동자 계급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지속되며 빈공화가 심화되면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불만이 상승하는 것이 이상적이며 일반적인 전개 방향이다.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노동자조합은 자본주의 작취 구조와 모순 심화를 타파하기 위해 사회구성원들 중 가장 진보적이며 혁명적 의식을 가지고 투쟁하게 된다.
물론 이상적인 상황이다. 실제로 인민의 노동자 계급과 자본주의 체재하의 가장 심화된 모순과 억압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는 계층은 오히려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자칭 보수 정당을 지지하며, 오히려 미소계층간의 구분과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대중은 사회적 모순 속에서 모순의 문제 제기와 파타라는 해결책 보단, 자본에 의한 계층간 이동을 선택했다. 그 결과 부동산과 주식 투자에 모든 논의가 집중되며, 집값과 땅값 올려주겠다는, 모두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는 정치인을 선택했다. 2000년 초 한국의 인삿말은 ‘부자되세요’가 되었다. 돈이 최고의 덕목인 사회이다.
자본에 의한 보수, 진보 프레임
자본에 의한 계측 투쟁의 양상은 정치적 선택으로 최근 다시 들어나기 시작했다. 서울시에서 진행한 무상급식 주민투표 안을 두고 벌어진 주민투표는 정책의 내용과 실상, 의의 등과는 무관하게 안을 제출한 정당 틀 안에서 투표가 이루어 졌다.
전통적으로 얘기되어 왔던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은 사라졌으며, 자본의 해바라기들은 그 내용에 대한 사우와 판단 작용 없이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정당의 안을 무비판적으로 수용, 선택했다. 이미 정당의 정책, 정치 프레임과 방향은 신자유주의의 추구와 그 주장에 기계적으로 반대하는 행위를 보이는 두 정당으로 나뉘어진지 오래다. 정책 정치는 없는, 자본 투표의 실상이 들어난다.
푸코의 말에 의하면 살게하고 죽게 내버려 주는 것이 곧 생명 권력이라고 말했다.
과거 중세까지의 권력은 단두대에서 참수하는 방법을 통해 사람들을 죽이고 그 과정을 전시함으로써 권력의 현존을 과시했다. 그러나 현대의 권력은 더 미시적이고 더 정교하게 사람들의 생명의 관리하는 형태로 작동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본이다.
생명권력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수단은 역설적으로 복지이다. 모든 시민의 교육 향상과 의효 해택에 힘쓰면 가장 효휼적으로 사람들의 반란을 잠재우는 것이 가능하다. 의료과 교육이라는 최소의 욕구와 인권 보장의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에 의해 관리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개인에게 있어 교육과 의료와 같은 인권 문제를 보장한다는 것은 거꾸로 이들의 생명권력을 쥐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빨갱이 정책이라고 불리는 복지 정책이 사람들을 가장 보수적으로, 보수적인 방법에 의해 길들이고 관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모든 것이 돈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주도적으로 개인의 교육과 의료 해택을 챔인진다면 개인은 국가의 해택을 받고 있는 존재로써 인식되고, 따라서 국가에 대한 전통적 보수적 성향을 지니게 된다. 여기에 약간의 민족주의가 더해진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보수화가 진행될 수 도 있다.
그러나 복지 문제에 대한 자칭 좌파와 우파의 논쟁은 개인의 소득에서 마이너스 요인으로 생각되는 세금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다시 말해 보수적 가치와 진보적 가치의 논의는 없다는 것이다. 모든 논의 방법은 신자유주의의 관점에서 관측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주체적 사유와 비판의 부제
사실상의 좌파와 우파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보와 보수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최근 10년간 벌어졌던 큰 싸움은 대게 이러한 이념 대립이 아니라 상식과 몰상식에 근거한 싸움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상식이란 무엇인가? 적어도 한나라당은 찍지 말자와 같은 말로 대변되는 최소주의적 관점과, 선수가 아닌 심판임을 자처하면서 뛰어드는 자칭 중립주의자들의 목소리, 그리고 착취당하는 현실을 고발하지만 남을 착취하고 있는 본인의 모습에는 눈감고 있는 대중의 이중 잣대의 논의가 아닌가? 여기에 주체적 사유와 비판의 부제는 매우 큰 영행력을 행사한다.
가장 정의롭지 못한 기관으로 뽑은 기관은 사법부와 검찰이었으며, 가장 신용할 수 없는 언론사로 뽑은 곳은 조중동이었다. 반면 가장 신뢰하는 기관은 사법부와 검찰이며, 가장 영향력있고 신뢰하는 언론사는 다름아닌 조중동이다.
이들 가장 정의롭지 못하고 신용할수는 없지만 가장 영향력있고 신뢰하는 곳의 목소리의 파급력은 사유판단의 주체를 타자로 이관한다. 단순히 타자의 목소리를 따라한체 주체적 인식과 반성이 전혀 부제한체 이를 객관화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정당화 시킨다.
이들에 대한 대안의 부제가 원인이라고 말하던 것은 최근 한 인터넷 방송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사유판단의 주체를 또다시 그곳으로 이관하는 모습을 보인다. 실제 관노현 교육감에 대한 일련의 보도가 나간 직후 서울시 교육청 게시판엔 사퇴하라는 글이 도배되었지만, 해당 방송이 나간 뒤 급히 정정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는 광경을 목격한다.
대부분의 사회적 논쟁과 논의에서 상식과 비상식의 대립이라는 것은 이런 것들이었다. 주체적 사유와 판단을 스스로 거세한체 살아가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스스로의 사유와 비판보단 엘리트주의에 기대며, 집단내의 혹은 집단내의 권력층이 가지는 함의와 주장을 따라하고 이를 객관화라는 이름으로 사유의 주체를 타자에게 이양하는 이런 비이상적 현상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주체적 사유와 비판 기능을 타자에 이양한다고 해서 먹고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은 없다. 그러나 그렇게 평생 소, 돼지로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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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적어도 몇 사람은
억울해서 진짜 출세해 자본의 달달한 꿀맛에 길들여진다고 하면... 언제 그랬냐는듯 깔끔하게 자본편에 서있을 것 같은 느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