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의 사회적 책임과학자의 사회적 책임
Posted at 2011/03/08 07:00 | Posted in <에세이>/과학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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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 선서 [1]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으매,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는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 나는 양심과 위엄으로서 의술을 베풀겠노라.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나는 환자가 알려준 모든 내정의 비밀을 지키겠노라. 나는 의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겠노라. 나는 동업자를 형제처럼 생각하겠노라.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게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나는 인간의 생명을 수태된 때로부터 지상의 것으로 존중히 여기겠노라.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이상의 서약을 나의 자유의사로 나의 명예를 받들어 하노라. |
정치과학자 [2]
일반적으로 과학자는 실험실에서 연구만 하는 일 벌레일 뿐, 다른 사회적, 정치적 부분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사실 과학자들은 이런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그리스시대부터 여느 전문가 못지 않게 지속적으로 정치, 사회적 문제에 활발히 참여해 왔다. 실제로 2964년, 미국의 대통령선거에서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들이 린든 존슨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는 선거 유세를 나선바 있었으며, 2004년 대선에서 부시 행정부의 과학정책에 실망한 노벨상 수상자 48명이, "과학을 신뢰하는 대통령을 두고 있다면, 그래서 줄기세포 연구처럼 전망이 밝은 분야에 덧씌워진 규제를 없애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는 연설을 통해 존 케리 민주당 후보 지지를 선언한 바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이처럼 순수한 과학의 발전을 위한 과학자의 양심을 가지고 잇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 욕구를 위해 무책임한 행동을 하거나, 정치적으로 아무 상전이나 잘 섬기겠다는 과학자들도 한 둘이 아니다.
천동설과 지동설
과학자의 사회적 무책임을 본격적으로 그러낸 사건은 현대과학의 시조로 불리는 갈릴레이의 천동설 철회발언이다. 당시 갈릴레이가 36살이 되던 1600년에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브루노가 화형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부르노는 우주에 지구와 같은 세계가 무한히 존재할 것이며 미지의 생명이 살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결국 이를 빌미로 가톨릭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감옥생활 끝에 로마에 처형당했는데, 브루노의 이 같은 극형은 당시의 갈릴레이에게 부정적 영향을 주는데 충분했다.
그리고 그는 45살이 되던 1620년 망원경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입증하는 현상을 하늘에서 발견하였으나, 1616년 3월 5일에 코페르니쿠스 학설은 어리석고 불합리하며 신앙의 측면에서 이단적이라고 결의하며 하며 종교 재판에 회부된다.
마침내 1633년 6월 22일,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에서 "피렌체의 수학 및 물리학 교수인 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태양이 세상의 중심으로 한 지점에 붙박여 있으며 지구는 중심도 아니고 붙박이도 아니라는 본인의 지금까지 학설을 맹세코 부정합니다. 본인은 진심으로, 가식 없는 믿음으로 이 모든 오류와 이단 행위를, 요컨대 교회를 거역하는 일체의 다른 오류와 다른 의견을 부인하고 저주합니다"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고, 자신의 믿음을 철회하면서 방면되었다.
형질획득 유전
정부가 과학적 사실에 위배되는 정책을 시행할 때 과학자들이 이를 묵인하거나 방관한 사례도 적지 않다. 그 중 1930년대 독재자 스탈린이 통치하던 소련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수상쩍은 과학이 결합하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인 사례가 대표적이다.
공산주의의 사회 개조론은 본성보다 환경이 인간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라마르크의 진화론을 지지했다. 라마르크는 생물체가 새로운 형질을 획득하여 다음 세대로 넘겨 주므로 진화한다는 이론을 내 놓았으며, 이에 소련의 이론가들은 이를 바탕으로 환경을 개조하면 모든 인민에게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리센코에 의해 뒷받침 되며 강조되었다.
유전학자인 리센코는 획득형질은 유전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과 정면으로 맞섰다. 그 결과 리센코는 1935년 스탈린의 신임을 받아 반대자들을 숙청하며, 유전학은 사회주의에 해학을 끼치는 부르주아 학문이라고 주장했다. 리센코를 비판한 과학자들은 연구소에서 쫒겨나 시베리아로 추방되거나 감옥에 갇혔으며, 심지어 처형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전승국이 된 이후 리센코는 갈수록 영향력이 커졌다. 1948년 유전과학아카데미에서 개최된 유전학회에서 리센코 추종자들은 스탈린이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유전학을 금지하기로 했다고 밝혔으며, 리센코의 반대파들은 공산당의 방침에 따를 것을 약속했다.
리센코는 흐루시초프가 집권한 1954-64년 사이에도 유전학아카데미 회장을 지내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1965년 유전과학아카데미 회장 자리에서 해임되었으며, 1966년 정부의 전문가위원회는 리센코의 주장이 허위 사실에 입각한 사기였음을 고발하는 보고서를 발표하며 그의 권력은 붕괴되었다.
박정희 와 이명박 정권
한국의 과학자들 역시 박정희 정권시절부터 경제 부흥의 견인차로서 정치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특히 국민들은 과학자들이 독재 정권에 봉사하고 민주화에 무관심하더라도 도덕적으로 비난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학자들의 정치 참여에 대해서도 이해하는 쪽으로 사회 분위기가 잡혀갔다. 이후 대통령 선거마다 많은 과학자들이 여러 후보진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 규모가 갈수록 커지면서 정치인들은 난해한 분야인 과학기술 정책의 수립을 위해 해당 전문가들이 직접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과학자들의 정치참여가 사회적으로 점차 바람직한 현상으로 굳어졌다.
물론, 이러한 방향성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으나, 문제는 과학자들의 권력지향적 욕구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전공분야에서 획득한 박사 학위를 무기 삼아 연구하기는커녕, 권력주위를 맴돌며, 그들의 학연과 지연을 지렛대로 삼아 패거리를 만들고 과학계의 인사와 예산을 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곤 한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후보 선거운동에 나섰던 과학기술자들이 줄줄이 내정되었고, 정치권에 줄을 댄 사람들이 과학기술계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과학자의 윤리적 문제 [3]
원자폭탄의 제조
물리학자였던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2차 대전 때 원자폭탄의 설계와 최종조립 작업을 했던 뉴 멕시코 주 로스 앨러모스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는 맨하탄 계획 전체의 책임을 맡았던 그로브즈 장군과 협력하여, 3000여명 이상의 과학자들을 조직해서 계획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는 이미지와는 달리, 오펜하이머나 로스 앨러모스의 과학자들이 그로브즈에 의해 협박당해 원하지 않았던 연구를 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최고의 물리학자 집단에는 들지 못했던 오펜하이머는 로스 앨러모스의 연구책임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고, 그 지위의 유지를 위해 오히려 그로브즈의 비위를 맞추려 노력했다. 오펜하이머 휘하의 과학자들 역시 무기 개발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폭탄이 완성된 후에는 일본에 대한 폭탄 투하를 열렬히 지지했다. 1945년 8월 폭탄이 투하된 후 일본이 항복하자 과학자들은 떠들썩한 축하연을 벌였다. 오펜하이머는 축하연 장소의 한 귀퉁이에서 기자에게 자신이 한 일이 "조금은 두려웠음"을 고백하면서 그래도 폭탄을 만들기로 한 결정은 옳았다고 주장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공포가 알려지고 나서야 오펜하이머의 처음 두려움은 죄의식으로 변했다. 1946년 3월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긴장한 오펜하이머가 "각하, 제 손이 피로 물들었습니다."라고 말하자 트루먼은 "씻겨지겠지"라고 차갑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오펜하이머가 나가자 트루먼은 보좌관을 불러 "저 친구, 다시는 데려오지 마!"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오펜하이머는 1945년 10월, 로스 앨러모스의 수석 연구직을 사임했으나 계속해서 핵 문제에 관한 정부 내 상급 고문으로 재직했다. 그러나 그는 전후의 수소폭탄 개발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며 미소간의 무기 경쟁을 우려해서 개발에 반대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와 관련하여 그의 사상 전력이 의심되었고 1930년대 그의 공산당 연루 사실이 알려지면서 오펜하이머는 결국 1953년에 매카시즘의 공포의 표적이 되어 안보 기밀 취급권이 취소되었다. 오펜하이머의 '비극적' 사례는 핵무기의 개발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한 과학자의 도덕적 딜레마뿐만 아니라 그가 가져야 했던 사회적 책임이 무엇이어야 했는지에 대해서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글루 화이트 프로젝트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의 일이다. 저명한 순수과학자 47명으로 구성된 미국의 제이슨 연구단은 '이글루 화이트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3년 동안 30억 달러를 들여 진행된 이 사업의 주요 내용은, 고속의 비행기를 이용하여 호치민 루트 위에 고성능의 음향탐지기와 지진탐지기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땅에 묻혀 있는 이 정교한 탐지기는 북베트남군이 남하할 때의 미세한 진동과 소리를 탐지하여 열대식물로 위장된 안테나를 통해 정찰기로 송신하고, 이 신호는 다시 타이에 있는 컴퓨터 센터에 전송되어 B-52 폭격기의 출격으로 연결되었다. 이 계획은 매우 성공적이었는데, 미국은 지상에 단 한 명의 군인도 출동시키지 않고서도 남하하는 병력의 80% 를 섬멸할 수 있었다.
베트남 전역에 독성이 증가된 상태로 광범위하게 살포된 고엽제였던 에이전트 오렌지와 더불어 베트남전에 실제로 응용된 첨단 과학기술을 보여주는 이 사례는 우리에게 현대사회의 과학기술이 제기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생각하게 해 준다. 우선 저명한 순수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 알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들 수 있다. 고도로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연구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오늘날의 과학기술자들은 자신의 연구가 지니는 사회적 의미를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더구나 책임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 사회적 결과야 어떻든 간에 과학연구는 여전히 가치배제적이며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라는 생각은 그들에게 너무나 뿌리깊게 박혀 있다. 이것은 '과학연구의 중립성에 대한 신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서 과학자들을 길러내는 교육제도와 그들의 연구가 그 속에서 수행되는 사회체제, 그리고 엘리트 문화에 의해 조장되고 있다.
평화의 댐
1986년 북한이 상류에 금강산 댐을 착공하자, 당시 한국 정부는 이 댐이 한국을 물로 공격하려는 것이라 보고 대응댐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북한이 금강산 댐을 폭발시킬 경우 서울 국회의사당이 잠길 정도로 물이 차오를 것이며, 이러한 공격이 88올림픽을 겨냥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이를 막기 위해 평화의 댐이 건설되었는데, 당시 661억여 원의 국민 성금을 모아 1987년에 착공하여 1989년에 1단계 공사를 마쳤으나, 1993년 국정감사에서 금강상 댐의 위협이 과장되었음이 밝혀졌다.
당시 모든 미디어에서는 국회의사당이 전부 물에 잠기고 63빌딩이 반 정도 잠긴 가상도를 되풀이하여 방영, 보도했으며 이러한 과장 왜곡 선전에는 여러 전문가들이 동원되었다. 특히 A대학 목공학과 교수 B는 당시 공적인 자리에서 북한의 수공 위협과 대응 댐 건설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나중에 자신은 북한이 댐을 짓는다면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라고 변명했고, 당시 평화의 댐 건설단 단장은 시간이 지난 뒤 자신들은 엔지니어로서 나라가 만들라고 한 댐을 만든 것뿐이라고 항변하기도 했다.
황우석 사건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는 2004년과 2005년 저명한 국제과학학술지 사이언스지에 환자 치료를 위한 복제 배아 줄기세포를 수립했다는 논문을 실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황우석 전 교수는 줄기세포를 통한 치료 가능성을 대대적으로 선전했으며 언론과 정치권은 이 기술을 통해 얻어질 엄청난 경제적 이익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연구팀에 있던 한 연구원의 폭로와 이어진 논란을 통해 이 논문들이 조작되었음이 밝혀졌다. 줄기세포는 수립된 적이 없었으며 논문에 실린 데이터와 사진들은 모두 조작된 것이었다.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기 시작했던 2005년 12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20여 명은 황우석 전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와 관련하여 그 응용 가능성이 과장되어 왔으며, 자신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침묵했음을 고백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 이전 몇 년 동안 국내외의 환자와 그 가족, 그리고 대다수 국민들이 줄기세포 치료제에 대한 기대에 열광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황우석 전 교수의 과장된 언행을 지켜보면서 의사로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가 부정이 밝혀지자 입을 열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그나마 이 한 쪽짜리 성명서에는 대표 한 명 이외에는 자신들의 이름조차 밝히지 않아 끝까지 책임을 회피하는 자세는 드러냈다.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 [4]
앞서 사례들을 살펴본다면, 과학자적 양심과 가치에 따라 엄정하고 객관적 판단과 윤리의식을 함양해야 할 것 같은 과학자들의 실상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원인은 무엇인가?
가장 먼저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은, 과학자에게 주어진 윤리의식에 대한 선언 혹은 강령에 대한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최근에 와서야 연구윤리의식의 확산으로 인해 과학기술인의 윤리 강령을 정하고 공표하는 사례가 늘고 있고, 황우석 사건 이후 국내 4개의 과학기관이 과학기술인 윤리강령을 선포하였지만, 본문의 서론에서 언급 한 '히포크라테스의 선언'와는 달리 하나의 지침이나 강령이 아닌 과학자 개인의 윤리의식 함양과 책임을 다 해야 한다는 식으로 의미하는 바다 모호하며, 주관적 해석이 따를 여지가 많다.
또 다른 점은 과학의 거대화에 의한 책임소재의 문제가 있다. 과학이 거대화 되고, 프로젝트 단위로 팀이 구성되어 운영되면서, 과학자간의 공동 작업이 일반화되고 분업화 되었다. 그 결과 이 프로젝트가 어떠한 사회적 함의를 가지는지에 대한 문제에 있어 과학자 개개인에게 분명한 책임소재를 묻기 힘든 문제가 생긴다. 실제로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일반 연구원들은 해당 프로젝트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알 지 못한 체 연구에 착수했던 사례가 있다. 따라서 이 경우 누가, 어떠한 책임을 가지며, 얼마만큼의 책임을 가지는지에 대한 판단이 매우 모호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또 있다. 원자폭탄에 참여한 연구자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대부분의 과학연구자들은, 전문지식인임에도 법조인이나 의사와 같은 전문직 종사자와는 달리 피고용인으로서 연구에 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기본적인 책임 문제가 모호해진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특히나, 피고용인의 위치 때문에 과학자 개인의 자유가 제한된다는 점은 설사, 해당 연구에 대한 과학자 개인의 반대의견이나 사회적 책임성 문제를 파악하더라도 이를 적극적으로 연구 방향을 조정하거나 개선해 나가기는 사실상 어렵다.
지난 황우석 사건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문제점은 과학인에게 요구되는 지난친 경쟁의 논리다. 당시 황 전 교수의 거짓말이 상당기간 동안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주요한 원인은 줄기세포와 관련한 모든 논의를 세계1등으로 몰아가는 분위기와 함께, 과학 선진국인 미국과 일본을 앞질렀다는 기대감에 고취되어 있었던 점, 그리고 한국 과학 정책의 기본적인 기조가 단기선과 위주라는 점이 주효했다. 때문에 과도한 경쟁의식과 단기적으로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부정행위를 불러올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의에서 반드시 과학자 개인의 문제나 윤리의식 만을 문제 삼을 순 없다. 앞선 언급한 것처럼, 과학기술인은 대부분 피고용인의 입장이라는 점 때문에 개인의 의사 개진이나, 이의 재기가 제한되며, 또 이를 충분히 보장할 수 있는 내부 고발 고발자에 대한 보호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문제 있다. 앞서 언급한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연구원의 예처럼 만일 해당 연구원이 프로젝트의 목표와 목적을 알고, 그것이 다시 개인적 관념과 철학에 상충한다고 해서 그것을 거부하거나 내부 고발이 가능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가 상당부분이다.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 문제 이전에 제도확충과 정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정치과학자의 예들에서 볼 수 있듯이, 내부고발자의 보호가 충분히 이루어 진다 하더라고 과학자 개인의 도덕기준이 다르다면 어떤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 충분히 살펴볼 수 있었다. 이처럼 과학기술인은 전문지식인으로써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지식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같은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에 대한 작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때문에 과학기술인은 그 무엇보다 사회인으로써 그리고 윤리적 주체로써의 윤리의식을 가져야 한다.
물론 이 같은 내용은 매우 원론적인 내용이긴 하지만, 어디까지 과학자 개인의 양심과 윤리의식에 맞길 수 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대형화되어 가는 과학 연구 과제에 대한 사회적 책임 소제에 대한 논의 역시, 결과에 대한 무거운 사회적 책임을 누구에게 묻는 것이 합당한지의 여부도 기준이 모호하고, 일반인들이 그것이 옮고 그른지에 대한 감시와 비판도 제한적이다.
따라서, 과학자 개개인은 과학의 효용과 의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연구 혹은 자신이 맡고 있는 연구가 향후 어떠한 사회적 함의를 불러일으키고 영향을 줄 것인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윤리의식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1] http://moral.snu.ac.kr/pds/data/00/003.html
[2] Physics&High Technology, Decenber, 37-39 (2008)
[3] http://walker71.com.ne.kr/refer07.htm
Physics&High Technology, April, 27 (2008)
[4] http://www.kcsnet.or.kr/main/k_chemedu/pdffile/34_04/3404013.pdf
Physics&High Technology, April, 28-31 (2008)
송성수,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 과학기술정책연구원, 2001, 12-23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23486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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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과학자의 순수함은 세상에서 찾아 보기 힘들겠죠.
그러나 묵묵히 세상을 밝게 만드려는 과학자가 이 땅에 있다고 저는 믿고 삽니다.
예를 들어, 핵무기 개발 과정에서 유도된 많은 연구 결과들은 쓰이는 목적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인간을 이롭게 하는데 사용될 수 있죠. 베트남 전쟁에 사용된 지진 탐지기와 음향 탐지 기술 역시 인류 복지를 위해서 얼마든지 좋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물론! 만들어진 핵무기를 과학자들이 아무리 사용을 반대했다고 하더라도 정치인들은 그걸 사용하고야 말았겠죠. 또한! 국가, 인종, 지역에 따른 핵무기의 개발 가능성은 자연 법칙에 의해 제한되지 않습니다. 자연법칙은 철저하게 무심하죠. 어딘가에서는 만들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사용했을 것이라고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핵무기를 제작하지 않고 그 기술을 좋은 목적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역사는 그렇게 흐르지 않았죠.
본문에서 언급된 과학자에게 요구되는 윤리는 과학자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인간에게 요구됩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과학 기술의 윤리적 사용이라는 과제를 과학자에게만 요구하는 건 너무 잔인하다는 것이죠.
중요한 점은 말씀해 주신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오직 과학자에게만 윤리의식을 강요하기보단 화이트칼라층의 윤리의식 제고가 더 중요하고 강조되어야한도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위업 -> 의업] 으로 고쳐주세요.
...... 뭔가 오타 지적만 하고 튀기는 그래서 그럴듯한 의견을 덧붙이고 싶은데 글이 잘 안 써지네요 ㅠㅠㅠ
[지금 싹 다 지우고 다시 쓰는 게 벌써 네 번째... ㅠㅠㅠ]
그리고 제 글들은 재미없는 글들이 대부분이라, 억지로 댓글 쓰려하지 않아도 상처받지<< 않는 답니다.. ^^*
비단 과학자 뿐이 아니라,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